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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하계 올림픽

by 스마트매니저 2025.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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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하계 올림픽(영어: 1896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I Olympiad, 그리스어: Θερινοί Ολυμπιακοί Αγώνες 1896)은 393년을 마지막으로 끝난 고대 올림픽 대회 이후 열린 첫 근대 올림픽 대회다. 1896년 4월 6일부터 4월 15일까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고대 그리스가 올림픽의 발상지여서 첫 근대 올림픽이 열리기에 적당한 장소였던 아테네는 1894년 6월 23일에 파리에서,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쿠베르탱이 주관한 올림픽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개최지 자격을 얻었다. 또한 하계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조직되었다.

여러 어려움을 이겨낸 1회 올림픽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시의 국제 경기 중에서는 이 대회가 가장 많은 국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19세기 때 유일한 올림픽 경기장으로 쓰인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경기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2] 개최국인 그리스에게 있어서 가장 절정이었던 부분은 마라톤 경기에서 자국 선수인 스피리돈 루이스가 승리의 영광을 차지한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카를 슈만이 레슬링과 체조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따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가장 많이 메달을 딴 선수는 헤르만 바인게르트너로 6개의 메달을 땄다.

대회가 끝난 후 IOC는 이후의 올림픽을 계속 그리스에서 개최할 것인가를 놓고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과 그리스 임금인 요르요스 1세, 몇몇 미국 선수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으나 1900년 대회가 이미 파리에서 열리기로 결정된 상태였고, 이후 올림픽은 세계를 순환하면서 개최하게 된다. 1906년 중간 올림픽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는 200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할 때까지 108년간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했다.

올림픽에 대한 재논의
19세기에는 소규모 스포츠 행사가 유럽 전역에 걸쳐서 실시되었으며 고대 올림픽 이후로 이름이 붙여진 대회들이 생겨났다. 1870년 파나티네코 경기장에서 열린 올림픽에는 약 30,000명의 관중이 몰려들었다.[3] 그 후로 몇 해 동안 이 관중수를 넘는 경기는 없었다. 윌리엄 페니 브룩스 박사는 전 세계의 국가가 여러 스포츠 경기를 하는 무엇인가를 만들자고 제안했으며 쿠베르탱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올림픽도 세계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다양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종 그리스인 남자만이 참가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이 붙은 올림픽이기도 했다. [주 3] 쿠베르탱은 1890년에 올림픽 개최지와 관련해서 La Revue Athletique에서 잉글랜드 슈롭셔주에 있는 웬록을 지지한다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 웬록이라는 곳은 1850년 10월에 지역 내과의인 윌리엄 페니 브룩스가 웬록 올림픽을 개최한 한적한 시골 마을로, 웬록 올림픽은 축구, 크리켓, 고리 던지기같은 스포츠나 오락 축제를 벌인 대회이다.[5] 쿠베르탱은 사무원이자 박애주의자인 에방겔리스 자파스가 1859년, 1870년, 1875년에 실시한 자파스 올림픽에서도 영감을 얻었다.[6] 1896년 대회는 에방겔리스 자파스와 그의 사촌인 콘스탄티노스 자파스의 유산과[7][8][9] 콘스탄틴 왕자를 통해 파나티네코 경기장의 두 번째 재건축 지원을 지속적으로 그리스 정부에 요청한 조지 애버로프가 자금을 지원하였다.[10] 40년전에 이미 에방겔리스 자파스가 자신의 돈으로 경기장의 대리석을 재건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1]

“ 바론 드 쿠베르탱의 예의바른 요청에 진실함을 느끼며 나는 그와 의회 회원들에게 올림픽의 재건에 대한 나의 진실된 감사함을 보냈다. ”
— 요르요스 1세, (1894년 6월 21일)[12]
1894년 6월 18일, 쿠베르탱은 11개국 스포츠 협회의 대표인들에게 그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서 파리에 있는 소르본에서 의회를 구성했다. 그의 제안이 의회에서 승인되어서 첫 번째 근대 올림픽 개최지와 일정을 정해야했다. 쿠베르탱은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 맞춰서 1900년에 같이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6년이라는 공백이 생기므로 그로 인해 대중의 관심도가 낮아질 것을 염려한 의회 회원들은 1896년에 대신 올림픽을 여는 것을 제안했다. 일정이 정해지자 이번에는 개최지를 정할 차례였다. 어떻게 아테네가 1회 올림픽을 끝내 개최하기로 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다음 해에 쿠베르탱과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는 의회 사람들과 충돌했던 개최지 선정 과정을 떠올리며 그와 비슷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많은 기록들에 따르면 몇몇 대표단들이 처음에 런던을 개최지로 제안했지만 쿠베르탱이 거절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리스를 대표하는 비켈라스와 짧은 토론이 있은 후에 쿠베르탱은 아테네를 제의했다. 비켈라스는 6월 23일에 아테네의 공식 신청안을 만들었으며 의회는 그리스가 올림픽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결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 후에 비켈라스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3]